라브린스를 걸었다. 가슴으로 걸었다.
한국살렘에서 10/30-11/4까지 있었던 영성수련모임에서 라브린스를 걸었다.
전에도 두세번 걸었던 경험이 있어 아무 기대없이, 주어진 코스(?)는 다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라브린스를 걸었다. 라브린스를 걸으려 내려가 보니 이미 두분이 걷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라브린스를 걷지 않고 그 주위를 먼저 돌았다. 두세번 그 주위를 걸었다.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왜 우린 돌아가는 길을 걸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인생은 돌아가는 길, 돌고 돌아가는 길’이라는 생각이 머릴 휘감았다. 직선으로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 그 길은 직선으론 갈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 당신이 계심을 알려주시려 부러 돌아가게 하셨다. 정신없이 앞으로만 가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당신이 옆에 계신지도 모른 채 달려만 갈테니까 구비 구비 돌아가게 하셨다. 돌아가면서 알게 하셨다. 깨닫게 하셨다. 어디로 가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말이다.
인생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인생이란 것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고 도는 것이 인생이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길이었고 그 길이 바로 하나님께 가는 길이었다. 은혜였고 은총이었다. 순간 나는 더 걷질 못하고 그냥 멍하니 서있었다, '이런 인생을 직선으로만 가려고 했었구나'라는 회한 같은 것이 들었다.
이윽고 라브린스에로 첫발을 디뎠다. 발을 디디려는 순간에 그분께서 나를 받아 주신다는 느낌이 들었다. 웬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 벅차오르는 가슴으로 첫발을 디뎠다. 그리고 다음 발을 내밀었다. 발걸음을 한 발자욱씩 뗄 때 마다 그분이 함께하고 있음이 더욱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렇기때문에 발걸음을 쉬이 뗄 수가 없었다. 그분과 좀더 함께, 그분을 좀더 많이 느낄려면 빨리 걸을 수가 없었다. 천천히, 보다 천천히. 이렇게 주문하면서 나는 한걸음 한걸음 그분과 같이 걸었다. 아니 이미 그분은 바닥에 계셨고, 그 공간에 계셨고, 내딛는 발걸음 위에 계셨다. 내가 있는 이 공간과 시간이 거룩하게 느껴졌다.
걷다 보니 좀더 빨리 가고 싶었다. 목적지에 빨리 닿고 싶었다. 조금 더 빨리 그분과 하나되고 싶었다. 그순간 말씀이 임했다. '조급해 하지마라. 그러다가 나를 놓친다. 천천히 가거라. 그래야 내가 있는 줄 알거 아니냐?' 말씀을 듣는 순간 그분이 진실로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이 가슴에 와 닿았다. 눈물이 흘렀다. 조급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나는 더 천천히 걸었다.
그렇게 천천히 걸음을 걸었다. 주님의 현존을 느끼면서. 한걸음 한걸음 매우 천천히. 그런데 시간이 조금씩 흐르게 되면서 걷는 길이 지루해지기 시작헸다. 아무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걸음은 무미건조해 지기 시작했다. 걸음에 진보가 없는 것 같았고, 이 길로 가면 정말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었다. 이 길은 정말 내 길인가? 하나님은 지금의 시점에선 보다 다른 것을 원치 않으실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걷는 걸음에 변화를 줘야겠다는 유혹이 왔다. 걸음을 보다 빨리 하고 싶은 생각이 다시 들었다. 좀전에 천천히 가거라는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루함에 무너지고 있다. 변화 없음에, 무미건조함에 넘어지고 있었다.
기도생활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곤 했다. 현존을 느끼며 기뻐한 것도 잠시 기도는 마치 사막을 걷듯 무미건조 해진다. 기도의 진보가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드리는 이 기도가 제대로 드리는 것인가? 잠시 회의가 들기도 한다. 라브린스가 이와 같았다. 이런의미에서 ‘라브란스를 걷는 것은 관상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라고 느껴졌다.
'그대로 가라. 앞이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대로 가거라. 어둡더라도 그대로 가거라. 네가 내안에 있음을 잊지 않는다면 그대로 가거라. 내가 네 발등상이 되리니 그대로 가거라.' 다시 또 주님의 말씀이 임하였다. 어쩔 줄 모르는 내게 친히 말씀을 주셨다. '그대로 가라‘고. 순간마다 임하는 그분의 사랑이 절절히 느껴졌다. 또 다시 눈물이 흘렀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기뻤다. 그리고 편히 쉬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 가보니 그곳 또한 종착역이 아니었다. 새로운 출발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분과 하나 된 그대로 있고 싶었다. 그러나 다시 걸음을 되돌려야 했다. 그대로 머물고 싶었다. 천막 셋을 짓고 그대로 변화산에 머물자던 베드로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도 아마 이 마음이었을 것이리라. 그러나 그분은 어디에도 머물지 말라신다. 그곳이 내게 천국처럼 느껴진다 하더라도 머물지 말라신다. 머물고 싶었지만, 그대로 있고 싶었지만 나는 다시 새 길울 떠나야 했다.
그 길은 내가 이제껏 걸어온 길이었지만 지금의 내겐 전혀 새로운 길이었다. 모든 것은 그대로 있었다. 길은 옛길 그대로 였지만 나는 옛사람이 아니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분이 내안에 있고 내가 그분 안에 있음이, 걸음걸음이 그분과 하나 되어 걷는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분이 원하시는 곳은 어디든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분이 가라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야겠다. 가는 곳곳마다 그분이 주신 충만한 사랑을 나누고, 빛을 비추리라. 아무리 어둡고 우울한 곳이라도 그분이 가라시면 가야한다.
그런데 내가 찾아가는 그곳에 이미 그분이 먼저 와 계셨다. 그곳에서 나를 부르신 것이었다. 그분은 어둠에 지친 이들과 함께 하셨고 바로 그 고통 속에 계시었다. 그분은 나를 부르신 것이 아니었다. 내안에 계신 그분을 부르신 것이었다. 以天食天이었다. 사람들의 어둠과 고통 속에 계신 그분이 내안에 계신 그분을 부른 것이다. 나는 그냥 단순한 도구에 불과했다. 너무 죄송했다. 그분은 고통 속에 계시는데 나는 도구밖에 되지 않아 그분께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주님, 도구 이상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바로 응답이 왔다. '사랑하는 아들아, 도구로도 너무 충분하단다. 도구가 되어준 네가 고맙구나.' 도구만으로도 고맙다는 그 말씀에 나는 어쩔 줄 몰랐다. 내 눈에선 다시 눈물이 흘렀다. 한없는 감사의 눈물이었다.
그분이 먼저 와 계셨고, 나를 초대하셨고, 내 마음을 움직이셨고, 내 발걸음을 인도하셨다. 그분은 나를 반기셨고 도구로서의 내 할일을 다 하게 하셨다. 라브린스는 발로 걷는 길이 아니었다. 그길은 가슴으로 걷는 길이었다. 가슴으로 걸어야만 걸울 수 있는 길이었다. 가슴으로 걸어가는 그길은 바로 기도였다. 그분과 하나 되는 기도였다. 그분이 그길을 걷게 하셨다. 그렇게 기도하게 하셨다.
라브린스를 다 걷고 나오니 시간은 어느새 두시간정도가 지나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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